4) 인적 연망을 보여주는 자료들 ?

257-260)로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윤자영(회장). 특히 1910년대에 작성된 문서로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1918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각 지역 한인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의 한글, 러시아어 공식회의록이다. 이는 유고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당면한 출간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이들 자료 가운데 한인이주와 독립운동 관련 자료는 1번 폰드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문서들은 토지분배, 한인의 당가입, 당학교나 기술교육대학 입학, 당원청결문제. 1930년대 문서들은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 이전까지 한인들의 토지이용문제, 한인 노동력 문제, 한인사회주의자들간의 파벌투쟁문제, 강제이주를 전후로 한인들에 대한 부동산 배상과 인력배치문제, 한인이주와 관련한 당국의 전문과 조치, 이주열차, 고려사범대학과 고려극장, 한글신문 ‘선봉’ 기사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극동문서보관소에는 극동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들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블라디보스톡 동방대학 문서 폰드번호 226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극동문서보관소에는 현재 한인이주관계, 한인귀화관계, 1905-1917년까지 한인의 독립운동, 1923년 이후 사회주의 건설기의 한인 등에 대한 자료가 집중되어 있다. 또 Ф.28의 Оп.1, Д.377, Л.24-24об./25/29-29об./40-40об.(4건)은 최관흘의 예배소 건물부지 할당 청원문제와 장로교의 활동에 대응한 정교회 지도부의 성전 건축, 교리문답학습 강화 등의 실질적인 대응 조치들에 대해서, Ф.87의 Оп.1, Д.278, Л.19(1건)과 Д.1566, Л.3(1건)은 최초의 한인정착촌인 티진헤(지신허) 마을 촌장 최운국을 포함한 한인 3가구의 최초의 정교회 세례와 세례자들이 러시아 국적에 편입되며 행했던 선서문에 대해서, Ф.143의 Оп.5, Д.143, Л.72-72об.(1건)는 블라디보스톡 주교구 정교선교협회 위원회의 활동 이후 한인을 포함한 이민족 교화 및 교육문제에 대해서, Ф.226의 Оп.1, Д.375, Л.1-2об.(1건)은 블라디보스톡 및 캄차트카 대주교가 장로교의 침투에 대응해 한인들에 대한 호소문을 인쇄해 줄 것을 동방대학교(Восточный Институт)(현 극동국립대학교 전신) 학장에게 요청하는 내용과 부록으로 호소문 ‘한인들에게 고하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밀양변씨는 변정실의 증손 卞高迪이 밀양으로 이주한 것을 계기로 밀양을 삼았다. 거창의 밀양변씨는 여말선초의 대학자 卞季良의 형 卞仲良의 후손으로 15세기 말 거창에 입향하였고, 임진왜란 전후에 卞淸이 병산으로 이주하여 그 후손이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이 사료군은 러시아 이르쿠츠크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한국 관련 자료들이다. 이 집안에 소장된 자료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바로프스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소장된 러시아극동지역의 한인관련자료 가운데서 수집 해제대상이 된 자료들은 14개 문서군에 속해있는 총55개로 분류된 문서들이다. 우선 이 문서군들 중에서 한인의 정교회 및 개신교 종교활동과 관련, 연구자에 의해 직접 입수가 되어 해제가 된 문서들을 다음과 같다. 또한 Ф.244의 Оп.3, Д.353, Л.35쪽(22건)은 1911년 4월 14일-1918년 1월 24일 시기 한인 박페오도르 사제의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Ф.702의 Оп.1, Д.566, Л.293/294/294об./296/297(5건)은 블라고베쉔스크 본성당의 종교감독국과 프리아무르 군관구 사령부실, 하바로프스크 군경찰국 간의 한인 김탁세 신분조회 요청 및 확인문제에 대해서, Л.332-333/337/336-336об.(3건)은 1914년 12월과 1915년 1월에 자레체 선교지구(миссионерский стан/선교지부) 선교사 요안 톨마체프 사제와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 곤다티 간의 비국적자 한인의 거주지로부터의 이주문제에 대해서, Д.748, Л.14/16-16об.(2건)은, 1912년 4월, 5월 교회용도의 부지를 외국국적 한인들에게 임대해 주는 것과 관련,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와 블라디보스톡 및 캄차트카 대주교 예프세비(Евсевий)에게 요청하는 내용에 대해서, Оп.3, Д.443, Л.13-17/21-26(2건)은 블라디보스톡 3년제 선교대학 규정 내용과 1914년 1월 4일 종무성(Ведомство правослвного исповедания)과 신성종무원 산하 경제국이 국가두마에 제출한 ‘블라디보스톡 주교구의 한인개종을 위한 한인선교부의 조직에 국고지원하는 문제에 관한 사업설명’에 대해서, Оп.5, Д.143, Л.64-71об.(1건)은 포세트지구 한인선교활동 및 선교사, 교회건축, 선교지구 설립, 교육발전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개인 소장 자료의 조사는 칠곡군 지역의 문중을 잘 알고 계시는 계명대학교 도서관 한적실에서 근무했던 인동 장씨 집안의 장상진 선생(국사편찬위원회 사료편찬위원, 대구 거주)과 광주 이씨 일원인 장인희 칠곡문화원 원장, 이택 칠곡문화원 부원장 등 여러 분들을 만나 자료 수집을 하려고 애썼다. 김아파나시와 이영선의 자전적 회고록을 비롯하여 이동휘, 황운정, 이영선, 장범태, 김진, 박윤세, 박애, 김동우 등 주요 한인들의 과거경력, 특히 파쟁과 반혁명적, 친일적 혐의 등이 논의되고 있다. 조사의 주요 대상으로 설정하여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이번 자료 조사에서는 최초 발굴한 『경화』를 비롯해 근대 묘지 관련 기록, 농지개혁 관련 기록 등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변중량(1345∼1398)은 鄭夢周의 문인으로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여 密直司ㆍ左承旨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개국후 原從功臣에 녹명되기도 하였다. 명단의 부산오피 등은 각각 宜寧ㆍ咸陽ㆍ居昌의 수령이었다.

극동국립역사문서보관소의 한인관련 문서군(Фонд)은 주로 Ф.1(연해주 주관리국/Приморское областное правление/1898-1917), Ф.2, Ф.28(블라디보스톡 시참사회/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Городская Управа), Ф.143, Ф.244(블라디보스톡 주교구 관리국/Владивостокское Епархиальное управление), Ф.226(블라디보스톡 동방대학교/Восточный Институт во Владивостоке), Ф.702(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 사령부실/Канцелярия приамурского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а), Ф.704(아무르주지사/Военный губернатор Амурской области) 등이 있다. Ф.1의 Оп.2, Д.2020, Л.1/3/6(3건)과 Оп.11, Д.164,Л.3-4/4а-4аоб./5-6об./7/8-8об./9-9об./10-11/12-12об./13-13об./14-14об./15-15об./18/19/20-20об./21-21об./22/23-23об./28/29/32-32об./33-33об./35/36/37-37об./38-38об.(25건)은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최관흘과 이후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이에 대한 프리아무르 및 연해주 당국과 정교회 지도부의 반응 및 대응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미군정 시기의 자료로는 하지장군 공식서한철(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1948)과 24군단 문서(Records of XXIV Corps) 가 대표적이다. 이어서 講을 받는 방식과 절차에 대해 수록한 講儀가 첨부되어 있다. 이 사건의 중간에 강수홍은 변오석의 매득을 허위라고 주장하는데,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 손자인 乙明 때부터는 묘가 陜川 冶爐에 있어서 선초에 이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1722년 문서에서부터 1953년 문서에 이르기까지 총 4129개의 문서군에 약 50만종에 달하는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860년대부터 1940년이전의 문서는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문서를 국보로 여길 정도로 문서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인식되어 왔으므로 극동지역의 한인들에 대한 기록들이 생생히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다량의 과거 공산당 문서들에 대한 정리 분류작업이 진행 중에 있으며, 2006년부터는 공산당 문서들의 열람이 가능하다.